헝거-몸과 허기에 관한 고백

🔖 하긴 상처가 아니라면, 왜 쓰겠는가? 상처가 없으면 쓸 일도 없다. 작가는 (학자도 마찬가지다) 죽을 때까지 '팔아먹을 수 있는' 덮어도 덮어도 솟아오르는 상처wound가 있어야 한다. 자기 이야기를 쓴다는 것은 경험을 쓰는 것이 아니다. 경험에 대한 해석, 생각, 고통에 대한 사유를 멈추지 않는 것이다. 그 자체로 쉽지 않은 삶이고, 그것을 표현한다는 것은 또 다른 형태의 산을 넘는 일이다.


🔖 어떤 딸이 어떤 엄마의 딸이 되는 방식은 무한하다.


🔖 또 다른 광고에서 오프라는 진지한 어조로 말한다. "모든 과체중 여성 안에는 그들이 마음만 먹으면 이룰 수 있는 이상적인 모습이 있죠." 매우 인기 있는 개념으로, 우리 뚱뚱한 여자들 안에는 날씬한 여자가 살고 있다는 것이다. 이 광고를 볼 때마다 난 생각한다. 내가 그 말라빠진 여자 잡아먹어버렸지. 맛있긴 했지만 양이 너무 적더군. 그러면 진짜 나다운 나란 사기꾼이나 강탈자나 불법 거주자 같은 이 뚱뚱한 몸 안에 숨어 있는 날씬한 몸의 여자란 말인가. 이 얼마나 빌어먹을 소리인가.


🔖 나는 나를 싫어한다. 아니, 이 사회 전체가 나를 싫어할 것이 틀림없다고 말하고 있으니 내 생각에 적어도 내가 이것만큼은 제대로 해내고 있는 것 같다.

아니면, 이렇게 말할 수도 있겠다. 나는 내 몸을 싫어한다고. 나는 내 몸을 통제하지 못하는 나의 나약함을 싫어한다. 내 몸으로 인해 느끼게 되는 감정을 싫어한다. 사람들이 내 몸을 보는 방식이 싫다. 사람들이 내 몸을 훑어보고 내 몸을 대하고 내 몸에 말을 보태는 방식이 싫다. 내 자아의 가치를 내 몸의 상태와 동일시하는 것도 싫고 이 동일시를 극복하기가 쉽지 않아서 싫다. 나의 인간적인 취약점을 받아들이는 것이 너무 어려워서 싫다. 내 몸을 내 사이즈 그대로 받아들이지 못해 수많은 여성들을 실망시키고 있다는 사실이 싫다.

하지만 나는 나를 좋아하기도 한다. 나의 인격, 나의 특이함, 나의 유머 감각, 거칠면서도 낭만적인 구석이 있는 내가 좋다. 내가 사랑하는 방식과 내가 글 쓰는 방식이 좋고 친절함과 까칠함이 공존하는 내 성격과 말투가 좋다. 이제 40대가 되어서야 나는 나 자신을 좋아한다는 사실을 인정할 수 있게 되었는데 아직도 그래서는 안 된다는 의심이 나를 괴롭히기도 한다. 너무나 오랫동안 자기혐오에 힘없이 굴복하며 살았다. 나 자신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내가 사는 방식과 생각하는 방식과 내가 세상을 보는 관점을 긍정하는 그 단순한 기쁨을 허락하지 않으려 했다. 그러다가 나이가 들었고 다른 사람들이 어떻게 생각하는지 덜 신경 쓰고 되었다. 그 모든 발전 없는 자기혐오에 지쳐버렸고, 내가 나를 싫어했던 이유 중 일부는 다른 사람들이 내가 나 자신을 싫어하는 걸 당연한 일로 여길 거라고 추측해왔기 때문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마치 뚱뚱한 몸으로 이 세상에서 살아가려면 당연히 자기혐오라는 대가를 치러야 한다는 듯한 세상이 지긋지긋해졌다. ...

나 자신을 바꾸고 싶지 않다. 내 외모를 바꾸고는 싶다. 기운이 좀 있는 날에는, 투쟁심을 발휘하여 세상이 나의 외모에 반응하는 방식을 바꾸고 싶다고 생각하기도 한다. 이성적으로 생각해보면 진짜 문제는 내 몸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기운이 없는 날에는, 내 인격, 즉 나라는 사람의 본질과 내 몸을 어떻게 분리해야 하는지 잊어버린다. 이 세상의 잔인함으로부터 나를 어떻게 지켜내야 하는지를 까맣게 잊어버린다.


🔖 폭력은 간단해 보이지만 실은 매우 복잡하다는 것을 받아들이기 어렵다. 당신에게 폭력을 행한 사람을 사랑하고 그 사람 곁에 남을 수도 있으며, 당신을 사랑하는 사람이 당신에게 상처를 줄 수도 있고, 완전히 낯선 이에게 폭력을 당할 수도 있다. 당신은 너무나 끔찍한 방식으로도, 너무나 친밀한 방식으로도 폭력을 당하고 해를 입게 될 수 있다.


🔖 자기 관리란 어떤 면에서 부정이나 거부의 몸짓이기도 하다. 원하지만 가질 수 없다.


🔖 우리가 사는 이 세상에는 타인의 잔인한 눈초리와 지적질에서, 너무나 좁은 의지에서, 아니 이 너무나 큰 몸에는 너무나 작은 모든 것에서 도망쳐버릴 수 있는 안전한 은신처나 안전지대가 없다.


🔖 나는 허기가 마음과 몸과 심장과 영혼 안에 모두 있다는 것을 안다.


🔖 나의 슬픈 이야기 대부분은 이제 과거사가 되었다고 생각한다. 이제 나에게는 더 이상 참지 않는 것들이 생겼다. 혼자라는 건 짜증 나는 일이지만 나에게 끔찍한 기분을 안겨주는 사람과 같이 있느니 혼자 있는 편을 택하기로 했다. 나의 가치를 깨닫고 있는 중이다. 그 사실을 안다는 건 기분 좋은 일이다. 나의 슬픈 이야기들은 언제까지나 그 자리에 있을 것이다. 나는 나에게 이토록 슬픈 이야기가 많다는 사실이 싫어도 이 이야기들을 계속하게 될 것이다. 슬픈 이야기들은 언제까지나 내 어깨를 짓누르는 짐이 될 것이지만 나라는 사람의 본질을 깨달을수록 그 짐은 가벼워질 것이다.


🔖 나이를 먹으며 자기 인식이, 아니면 자기 인식과 닮은 무언가가 찾아왔고 이런 행동 유형을 경계하기 시작했다. 내가 선택한 이 사람 앞에서 내가 너무나 노력해야 하지 않기를, 너무 많이 주고 그 사람이 원하는 모습이 되려고 안간힘을 쓰지 않기를 바라게 되었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이 모습 그대로 살아가면서 이대로도 충분하기를 바라는 건 겁나는 일이기도 하다. 당신이, 지금 그대로의 당신 모습이 앞으로도 계속 충분할 수 있으리라 믿는 건 겁나는 일이다. 나 자신으로 살아가는 것에는 늘 불안함 점이 있다. "그러다 잘 안 되면?"이라는 질문이 언제나 머리 위에 둥둥 떠다니며 괴롭힌다. 내가 앞으로 영원히 이대로 충분하지 못하면 어쩌지? 내가 어떤 사람에게 영영 충분한 사람이 되지 못하면 어쩌지?


🔖 나는 치유의 정체가 무엇일지, 몸의 치유뿐만 아니라 영혼의 치유는 과연 어떤 모습을 하고 있을지 늘 궁금했다. 정신과 영혼도 뼈처럼 깔끔하게 붙거나 치료된다는 생각에 매혹되곤 했다. ... 하지만 치유는 그렇게 단순하지 않다.

몇 년 전, 나는 스스로에게 이렇게 말했던 적이 있다. 언젠가는 다른 이들 때문에 겪은 일들에 대해 느껴온, 조용하지만 끝없는 분노를 그만 느끼게 될 날이 올 거라고. 어느 날 아침 일어나보면 더 이상 플래시백은 없을 것이라고, 눈을 뜨자마자 내가 겪은 폭력의 역사에 대해 생각하지 않는 날이 있을 거라고, 맥주의 맥아 냄새를 잊을 수 있는 날이, 단 몇 초 동안이라도, 아니 몇 분, 몇 시간 정도는 내가 어디에 있었는지 잊는 날이 있을 거라고 생각했었다. 나를 괴롭히는 과거는 끝이 없었다. 그리고 그런 날은 절대 오지 않았다. 아니, 아직은 오지 않았다. 그리고 이제는 더 이상 그날이 올 것이라고 기다리지 않게 되었다.

하지만 다른 날이 오기는 했다. 나는 사람들의 손길이 닿을 때마다 움찔거리는 일이 적어졌다. 대부분의 경우 이제는 폭풍이 오지 않을 것이라고 믿을 수 있게 되었기 때문에 사람들의 다정함을 폭풍전야의 고요함이라고 늘 생각하지는 않게 되었다. 나는 나 자신에 대한 증오를 조금씩 거두고 있으며 스스로의 과오를 용서하려고 노력하고 있다.